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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년 6월
    PEOPLE/세상을 보는시각 2018. 1. 5. 13:01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 로 시작이 되었던 6월 항쟁이었다.

    유한열 열사가 죽고 사람들은 시청으로 몰려나왔다. 그때 높은빌딩에서는 수많은 종이들이 눈처럼 내려왔다. 근처의 직장인들이 색종이처럼 종이를 던진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50대는 아직도 그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 문재인정부가 자리를 잡아가며

    50대는 1987년을 지나갈 수 있을것 같다. 


    전두환이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겠다고 항복선언을 하고 노태우가 그 후게자로 지명이 되었다.

    뭔가 똥을 닦지 않은 그 찝찝함은 그다음해 겨울 노태우가 보통사람코스프레로 대통령이 되며 

    불안함이 현실이 되었다.


    83년 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첫 과단합회를 가졌다. 갓 고등학생을 벗어나 선배도 없는 학과의 1회입학생이었다. 우리는 서로 서로 술을 따라주고 건배를 하였다. 이름도 학사주점 그때는 그 학사주점이 인기였었다. 안주는 조개찌게 동태찌게 김치찌게 제육볶음 아마도 이정도가 다 였던것 같다. 하나가 더 있었네. 닭도리탕!


    막거리와 소주로 고주망태가 되고 친구들에게 업혀서 여관까지 와서 아침에 오바이트와 함께 숙취가 몰려왔다. 그래도 젊었을때라 일어나서 친구들과 아침을 먹으며 해장은 소주로 해야 한다고 국밥과 소주를 마셨다.


    점심무렵 대성로를 따라 학교를 올라갔는데 그날은 학교분위기가 달랐다.

    매캐한 최류탄냄새가 공기를 떠돌고 있고 학교분수대에는 청바지를 입은 수많은 청년들이 앉아있었고 학교주위골목에는 전투경찰이 배치가 되어있었다.


    그게 해골단을 본 처음이었다.

    워낙 잔인하게 진압을 하는놈들이라 데모도 단과대학건물에서 잠깐 몰려나와 찌라시 뿌리고 흩어지는것이 일상이었다.

    운이 좋으면 스크럼을 짜고 학교출입문까지 진출을 하는것이 최대한이었고 데모대열에 끼였다는 이유로만 교수실에 불려가서 야단을 맞아야 했다.

    만일 데모를 하다가 잡히면 며칠간 구류가 가장 가볍고 남자애들은 재수없으면 바로 군대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이것을 강제징집이라고 불리웠다.


    군대에 가면 저녁 9시뉴스에 데모하는 장면이 끝날때까지 꼴아박고 얼차려를 받아야 했다.

    데모하는 새끼들때문에 군대생활이 힘들다며 고참들이 괴롭혔다.


    2년반의 군대생활을 마치고난 그해가 1987년이었다.


    박근혜 대통령 4년은 젊은시절을 누군가 도려낸듯 아프고 신장하나를 도둑맞은듯 허전하였다.

    박정희딸 박근혜에게 바치려고 길거리를 그렇게 뛰어다녔던지 독재자 딸내미가 삼성동 통장도 안되는 인간이 사탕으로 국민들에게 발림을 하고 국정원을 동원한 술수로 정치를 기만을 하고

    50년의 시간을 뒤로 돌린것처럼 새마을운동을 강조하고 불량식품을 금지시키고 신문기사를 조종하고 땡전뉴스처럼 9시 뉴스에 패션쑈를 하는것을 보면서 내 나라의 미래가 얼마남지 안았음을 알았다.


    천운으로 박근혜를 503호실로 보내고 나라같은나라에 살게 되었다.

    첫불을 들어준 시민들에게 고맙고 1987년의 386들에게 감사하다. 잘견디고 잘버틴 우리들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종기는 뿌리까지 뽑아야 곪지 않은다.

     적폐청산은 이제 시작이고 나는 눈을 부룹뜨고 지켜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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