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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얀마에서 벌써 10년이 흘러갔다.
    PEOPLE/세상을 보는시각 2017. 3. 14. 18:26

    이곳에서 사업을 시작한지도 벌써 십년이 되어간다.  작년에 주정부가 생긴후 면칭도 정식으로 스테이트 정부라고 쓴다.


    1월에 파안을 가서 수상과 만나고 왔다. 난킨퉤민 수상은  (Nang Khin Htwe Myint ) 미얀마에서는 보기 드믈게 영어도 유창하시고 경제에 밝은 분이다.

    정식 명칭을 CHIEF MINITER로 불러야 할지 또는  MINISTER OF MINISTER라고 불러야 할지 물어보았는데 수상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고 하였다.

    아직도 중앙정부에서는 CHIEF MINISTER라고 명칭을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스테이트와 중앙정부간의 명문 명칭이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CHIEF 나 PRIME MINISTER 둘다 수상인데 차이는 모르겠다, 단지 이년전에 총선전에는 MINISTER OF MINISTER라고 불렀는데 총리 정도의 의미가 될것 같다.


    정식으로 총선을 하여 카렌주 의회가 생기고 의장과 의회에서 추천한 수상이 선임이 되며 주정부의 여러권한도 중앙정부로 부터 많이 이양이 되었다.


    사회간접자본 시설 도로나 댐 전기 발전소 자원개발등 외교나 군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권한이

    이양이 되어 큰 일을 하기는 상당히 편해졌다.


      % 수상실에서 찍은 사진인데 여러곳에서 촬영을 하여 바라보는곳이 다르다. KBS에 수퍼아시아에서  인터뷰 하였던 소포도 장군과 난킨 수상이시다.


    카렌수상께서 부탁을 한것은 한국기업의 인프라투자와 공단에 섬유나 가먼트 공장을 유치를 하여 달라고 하셨는데 노력은 열심히 하고 있으나 개인의 힘으로 쉽지 않은일이기는 하다.


    최근에 미야와디에 몰랴먀잉의 LNG발전소로 부터 전기가 송전이 되며 이곳도 외국공장들의 입주준비가 시작이 되었다. 기존의 공단에는 말레이시아의 루버공장이 크게 오픈을 하였고 기타 섬유공장들이 입지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단지 도로 사정은 양곤가는 길보다 방콕가는길이 더 빠르다는것이 단점이기는 하다. 태국에서 1천억원을 투자하여 꺼꺼레익에서 파안까지 도로를 확장을 할 예정인데 한 이년정도 걸릴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품들이 양곤항 보다는 태국의 람차방을 통해 수출이 되기 때문에 컨테이너가 대기하는 시간은 거의 없고 24시간내에 항구에 도착을 하여 전세계로 수출이 될수 있다는것이

    미야와디의 장점이다.


    그리고 미얀마는 최빈국 특혜관세가 적용이 되는 국가라서 한국 일본 유럽등 수출에 관세가 붙지 않는다. 미얀마에서는 향후 2-3년안에 가장 빨리 성장할것으로 예상이 되고 있는데  이곳에 어떻게 변해갈지는 미야와디에서 첫번째로 사업을 시작한 외국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흥미진진하다.


    소포도 장군은 개인적으로는 형님같은 분이신데 요즘은 나보다 장군께서 더 서두르시는것 같다. 10년을 사업을 하면서 다른사람들은 카지노도 하고 운송도 하면서 회사가 기워가고 있는데 건축이나 하면서 세월을 낚고 있는 모습이 안타까운신 모양이다.


    11에이커의 상업지도 미야와디에서는 가장 좋은 땅인데 태국사람이나 중국인들이 와서 사업을 하자고 몇번을 청했지만 거절을 하셨다.일전에도 이 땅을 개발하자고 말씀사신것을 듣는둥 마는둥하였더니 직접 데려가서 경계를 보여주고 미야와디 관계자를 만나서 인허가까지 명령을 하시고 무조건 작던 크던 시작을 하라고 하셔서 개발을 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이것이 내 밥인지는 잘모르겠다.


    % 다웨의 KNU4 여단장 미팅사진.


    10년이 금방지나 갔기도 하고 예전사진을 들여다 보니 여러사람을 많이 만난것 같다고 하다.

    인맥을 찾아다니고 사업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에게는 큰 자산이 되겠지만 하루 하루 먹고사는 일이 바쁘고 가끔 틈을 내어 애들하고 놀러다니는것이 인생의 낙인 나에게는 대수는 아니라고 생가을 하는데 이곳이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사업을 하며 지킬수 있는 약속만 하고 벽돌로 집을 만들듯 하나 하나 만들어 가는것이 불여튼튼한 일이라 여기고 있지만 도시가 발전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약간은 바빠지기도 한다.


    % 밋스터 꼬퀴. 참피언 그룹의 회장.


    꼬 퀴사장은 참피온 그룹의 회장이다. 만난지가 벌써 7년이 되어간다. 아는 사람이 소개를 하여 만났는데 꽤 오랫동안 보고있다. 첫만남이 인상적인것은 퀴의 사촌동생과 함께 나왔는데 큰 가방을 품에 않고 놓지를 않아서 독특한 사람일쎄 라고 생각을 하였다.

    같이 밥먹고 차마시고 양곤에 놀러오면 연락하라고 하여 출장때 만났는데 양곤에 있으면서 휴대폰을 쓰라고 주는것을 크게 연락할곳이 없다고 하고 거절을 하였는데 그때는 양곤에서 휴대폰 심카드 가격이 150만원인지도 몰랐고 폰이 백만원이 넘는줄도 몰랐을 때였다.


    퀴의 부친과 어머니, 사촌들가지 갈때만다 만나서 오리집 가서 밥을 먹었는데 한번도 내가 계산을 하지 못하였다. 워낙 겸손한 양반이라서 그때는 이 양반이 미얀마에서 두번째로 큰 농수산물 수출회사 회장인것도 몰랐다.


    한국의 생리대를 들여다 팔았는데 퀴가 반을 사주었다. 그런데 나도 못팔고 퀴도 못팔았다. 미얀해서 돈 돌려줄테니 다시 달라고 했더니 " 거절 " 하였다. 자기가 산것이니 알아서 팔던가 선물로 줄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데 생리대 양이 반컨테이너 였다. 아마도 퀴 회사 직원들은 아직도

    에지미인 생리대를 쓰고 있을것 같다.



    옷장사를 하던 시절의 한국에서 수입한 중고옷과 파안의 첫번째 지점이었다. 한달에 이천만원정도 팔았던것 같다. 미얀마 전역에 매장을 열어서 옷을 팔면 금방 부자가 될것 같았다. 그때는

    사람관리가 얼마나 어려운줄 몰랐을 때였다. 철없는 시절. 올챙이가 우물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던 때였다. 


    지금도 일을 크게 벌일수 있는 여러 환경도 준비가 되어있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이 사람관리때문이다. 잘해주면 되는줄 알았고 마음을 주면 인정으로 돌아올줄 알았던 때였는데 그때 마음고생이 아직도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지금은 많이 매정해 졌다. 사업을 키우면 더 매정해 질것이 분명하다. 외국에서 외국인인 사업하면서 실수 하지 않는 최선이지만 마음이 물러터진 내게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십년을 넘게 장사를 하고 있는것을 볼때 이미 매정해지고 차가운 심장으로 변해버렸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직은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아쉬운것은 학교 아이들에게 매달 한번씩 점심을 주었는데 어느순간 학생들이 500명을 

     넘어가며 힘이 붙어서 그만두었다. 큰 돈이 들어가는 일은 아니었는데 직원들이 학교에 가서 밥해주고 설것이 하다보면 이틀을 가게문을 닫아야 해서 그만두었는데 아쉽다.


    키로에 천원도 안하는 닭뼈를 사서 죽을 만들어 주었는데 아이들은 이렇게 살이 많이 붙어있는 음식은 처음이라고 맛있게 먹어주었다. 박근혜가 아프리카에 기증한 급식차를 이곳에 주었다면

    제대로 잘 써먹을것 같은데 ..


    올해는 중고차 하나 사서 급식차 하나 만들어서 전담직원을 두고 학교마다 돌아다니며 점심을 주고 싶은것이 희망사항중의 하나이다. 십일조는 못해도 버는것의 일부는 돌려주는것이 장사꾼의 도덕인데 너무 게을렀다. 


    아래는 이러 저러한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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